코카콜라 제국의 역사

코카콜라는 미국이 남북으로 갈라져 치열한 전쟁(남북전쟁)을 끝낸 19세기 말(1886년)에 세상에 등장합니다.

남북전쟁이 끝난 1865년은 일반 약국에서 조제하여 시판하는 약을 뜻하는 ‘매약의 시대’였습니다.

만병통치약이라며 과대광고를 통해 약의 효과를 부풀려 효능이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약이라 할지라도 약제사들은 약을 제조하여 판매하고 수익을 챙겼습니다.
이에, 존 펨버턴이라는 약사도 일확천금의 부푼 꿈을 안고 매약시장에 입성하게 됩니다.

존 펨버턴(John Stith Pemberton), 1831년 7월 8일 ~ 1888년 8월 16일

코카콜라의 창업자인 존 펨버턴(John Stith Pemberton)은 남북전쟁 당시 적에게 공격받았는데, 수술과정 중에서 다량의 모르핀을 투여받으면서 약물중독에 걸렸습니다.

약물 중독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펨버턴은 약제 제조방법을 배우다가 ‘코카나무 잎’의 성분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에 몰두하게 됩니다.
(코카나무 잎은 코카인이라는 마약을 제조할 수 있을만큼 중독성이 있습니다.) 

 

존 펨버턴은 페루의 코카나무 잎에서 추출한 코카와 아프리카의 콜라 너트에서 추출한 카페인을 섞어 ‘프랑스 와인 코카’라는 와인을 개발하였습니다.

‘프렌치 와인 코카’의 판매량은 날이 갈수록 증가했으며 실제로 매출도 크게 상승했습니다.

하지만 1886년 미국 애틀랜타에서 금주법으로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와인에는 알코올이 성분이 들어가서 금주법이 걸리므로 존 펨버턴은 와인을 빼고 코카나무 잎과 콜라나무 껍질 원액 그리고 약국에서 판매하는 소다수를 섞어서 음료를 만드는데, 이것이 콜라의 시작점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만들어진 콜라 시럽에는 특별한 이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품 출시에 맞춰 제품의 이름을 짓는 콘테스트가 진행되는데, 펨버턴의 사업 파트너인 프랭크 로빈슨(Frank Robinson)이 제안한 코카(Coca)와 콜라(Kola)를 합친 코카-콜라가 채택됩니다.
음의 운율을 맞추기 위해 콜라의 K를 C로 바꾸면서 현재의 Coca-Cola가 탄생하게 됩니다.
또한, 프랭크 로빈슨은 독특한 ‘스펜서 필기체’를 개발하고 코카-콜라의 로고도 만들어내는 쾌거를 이루어냅니다.

순조롭게 코카콜라의 위대한 여정이 시작되는 줄 알았지만 1886년 5월 8일 펨버턴이 만든 코카-콜라 원액을 연구실 근처에 위치한 제이콥스 약국(Jacobs’ Pharmacy)으로 보냈으나, 하루에 겨우 5~7잔 밖에 팔리지 않는 저조한 실적을 기록했습니다.

펨버턴은 이 음료가 엄청난 잠재력을 가졌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자신이 가진 사업지분을 다양한 사람들에게 판매하면서 지분을 양도하고 1888년 암에 인한 건강악화로 숨을 거두게 됩니다.

펨버턴이 판매한 사업지분들은 코카콜라의 소유권을 두고 치열한 진흙탕 싸움으로 번지게 됩니다.

애틀랜타의 사업가였던 아사 캔들러(Asa Candler)는 펨버튼의 지분을 산 사람중 한명이었는데, 혁신적인 비즈니스 감각과 통찰력으로 코카콜라의 가치를 파악하고 캔들러는 다른 사람들이 소유한 지분들을 사들이기 시작하면서 1891년에 코카-콜라에 대한 완전한 소유권을 가지게 됩니다.

 

캔들러가 코카-콜라를 소유하게 되면서 1889년 코카-콜라 시럽은 2,171갤런(8,218리터)의 판매량을 기록하고 펨버턴이 사망한 시점부터 1892년까지 코카콜라 시럽의 판매량을 10배나 상승시키며 1895년에는 7만5,244 갤런이라는 판매량을 기록합니다.

또한, 자신의 형인 존 캔들러, 프랭크 로빈슨과 다른 2명의 동료와 함께 ‘코카-콜라 컴퍼니(The Coca-Cola Company)라는 법인을 설립하고 코카-콜라의 초대경영자(CEO)가 됩니다.
이어서 브랜드의 중요성을 알고 있던 캔들러는 1893년, 특허청에 코카-콜라의 상표권도 등록하게 됩니다.

코카콜라 무료 쿠폰(1895년)

마케팅의 귀재였던 아사 캔들러는 공격적으로 마케팅을 펼칩니다.

세일즈맨을 고용하여 수천 개의 무료 쿠폰을 뿌렸고 1894년부터 1913년까지 약 20년 동안 코카-콜라로 교환된 쿠폰의 갯수가 약 850만개에 달할만큼 많은 양의 쿠폰을 뿌립니다.

1895년, 캔들러는 자신이 목표한 성공을 이루고 “현재 미국의 모든 지역에서 코카-콜라가 소비되고 있다.”고 발표했습니다.

코카-콜라의 인기가 하늘을 향해 높아지면서 캔들러는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바로 코카-콜라의 모방제품이 엄청나게 생겨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캔들러는 이를 방지하기 위해 ‘어두운 곳에서 만져도 깨진 유리조각을 보고도 코카-콜라의 병임을 알 수있게 만드는 사람에게 100만 달러를 주겠다’고 발표합니다.

미국 인디애나 주에 위치한 루트 유리공장의 디자이너였던 알렉산더 사무엘슨(Alexander Samuelson)과 얼 딘(earl Dean) 등 5명의 직원들이 제안한 디자인이 채택되면서 1916년, 코카-콜라의 특별한 유리병인 컨투어 보틀(Contouer Bottle)이 생겨나게 됩니다.

20년 동안 회사를 성장시킨 아사 캔들러는 1919년 2,500만 달러에 회사를 어니스트 우드러프(Ernest Woodruff)에게 매각합니다.

어니스트는 조지아 트러스트 컴퍼니(Trust Company of Georgia)의 회장이었습니다.

회사를 매입한 3년 동안 코카-콜라는 세계1차대전으로 설탕 가격이 치솟고 보틀링 생산에 대한 각종 문제와 모방제품과의 상표권 소송에 휩싸이면서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어니스트는 난관을 헤쳐가기 위해 자신의 아들인 로버트 우드러프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1923년, 로버트는 33살의 나이로 코카-콜라 컴퍼니의 회장으로 선출됩니다.

로버프 우드러프는 취임 후, 조직을 개편하여 품질과 서비스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에 중점을 두고 언제, 어디서든 완전한 맛과 서비스를 느낄 수 있도록 종업원의 복장규정, 위생규정, 시럽과 탄산수의 비율 등에 대한 정확한 기준을 세웠습니다.

우드러프는 사람들이 코카-콜라를 쉽고 간편하게 가져갈 수 있도록 최초로 손잡이가 달린 포장 박스를 내놓으면서 코카-콜라의 판매량이 급증하였고 많은 경쟁사와 맥주 업계에서도 이 포장법을 따라 하기 시작합니다.

1931년에는 코카-콜라 광고에 산타클로스를 등장시키면서 폭팔적인 인기를 누리게 됩니다.

이 후, 1933년 ‘금주법’이 폐지되면서 사람들은 이제 금주법이 없어졌으니 코카-콜라를 누가 마시겠냐고 했지만, 이미 코카-콜라는 사람들의 생활 속에 자리잡으면서 크게 타격을 받지 않았습니다.

1950년 타임지에는 인물이 아닌 제품이 최초로 표지모델을 장식하는데, 바로 코카-콜라가 이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출처 : 코카-콜라

2018년 코카-콜라 브랜드 가치는 약 75조원(663억 달러)이며 탄산, 스포츠음료, 생수, 주스, 차, 커피 등 총 500여 개 이상의 브랜드를 보유하고 있으며 그중 연간 1조원(10억 달러)이상의 매출을 기록하는 브랜드가 21개에 달한다고 합니다.

코카-콜라의 제조법은 극소수의 이사진에게만 알려져 있으며 1925년부터 애틀랜타 선 트러스트 은행(Sun Trust Banks)에 보관되어 오다가 지난 2011년, 코카-콜라 탄생 125주년을 기념하여 코카-콜라 박물관 ‘월드 오브 코카-콜라(World of Coca-Cola)’ 내부 금고로 이전되었습니다.

1993년에 80년에 걸친 과학자들의 시도 끝에 코카콜라의 비밀이라고 일컬어지는 머천다이즈 7X(Merchandise 7X)의 성분 비율이 밝혀지기도 했지만, 코카콜라 측은 성분배합의 순서가 핵심비밀이라며 신비주의 마케팅 기법을 고수하고 있습니다.